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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잊은 도구는 도구가 아니다

하베박스 2026. 3. 23.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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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블로그에는 껍데기만 남은 글이 넘친다.

Ahrefs의 분석에 따르면 신규 웹페이지의 74%가 AI 생성 콘텐츠를 포함하고 있고, Graphite의 조사에서는 신규 영문 기사의 절반 이상이 AI 주도로 작성된 것으로 나타났다. 블로그도 예외가 아니다. 그럴듯한 제목에 깔끔한 포맷, 적당한 길이까지 갖추고 있는데 읽어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글들이 차고 넘친다. 글을 쓴 사람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지 느껴진다. 통찰을 전달하려는 게 아니라 조회수에 최적화된 껍데기를 찍어내는 거다. 그런 글을 읽느니 차라리 궁금한 걸 직접 AI에게 물어보는 게 훨씬 낫다는 걸, 이제는 대부분 알고 있지 않나. 내 글도 껍데기만 있는 글일 수 있다. 하지만 알맹이를 채우려 노력하고 있다.

1999년, 저스틴 크루거와 데이비드 더닝이 코넬 대학교에서 더닝-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를 발표했다. 유머, 문법, 논리 등 네 가지 영역에서 실험을 진행한 결과, 하위 25%에 해당하는 참가자들은 100명 중 88등 수준의 성적을 받아놓고 자기가 상위 40% 안에 든다고 평가했다. 반대로 상위권 참가자들은 자기 능력을 약간 과소평가했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자기가 뭘 모르는지 모른다는 것이 이 연구의 핵심이다.

인터넷에 널리 퍼진 "우매함의 봉우리 → 절망의 계곡 → 깨달음의 오르막 → 지속가능성의 고원" 그래프는 사실 원논문에 없다. 2008년에 Simon Wardley가 블로그에서 만든 풍자적 도해이고, Gartner의 Hype Cycle을 변형한 것이다. 하지만 이 그래프가 원본보다 직관적이라 더 유명해졌다. 핵심 메시지는 동일하다. "나는 왜 이렇게 아는 게 없을까"를 느끼고 자신감이 줄어든다면, 그건 과대평가의 단계를 지났다는 뜻이다. 역량이 성장하기 시작한다는 긍정적인 신호다.

 

그런데 AI가 이 과대평가의 구간을 더 높고 길게 만들고 있다.

2026년 2월, 핀란드 알토 대학교(Aalto University)의 Robin Welsch 교수팀이 Computers in Human Behavior에 발표한 연구가 있다. 약 500명에게 LSAT(법학적성시험) 논리추론 문제를 풀게 하되, 절반은 ChatGPT를 사용하게 했다. 결과는 흥미로웠다. AI를 사용한 그룹에서는 기존 더닝-크루거 패턴이 사라지고, 모든 수준의 참가자가 골고루 자기를 과대평가했다. 더 놀라운 건 AI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더 과신했다는 점이다. 연구팀은 이를 "역 더닝-크루거 효과"라고 불렀다. AI의 출력을 검증 없이 신뢰하면서 자기 판단력에 대한 반성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 연구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초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AI에게 질문하면 그럴듯한 답변이 나온다. 그걸 그대로 쓰면 결과물이 만들어지니까, 본인이 이해하고 만들어낸 것처럼 느끼게 된다. 과대평가의 구간이 길어진다는 건 역량이 성장하는 속도가 느려진다는 뜻이다. 실패를 경험해야 진짜 배움이 시작되는데, AI가 실패의 경험을 가려버린다.

AI를 사용하는 방식이 문제다. 리서치를 읽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결과에서 통찰을 얻어야 하고, 그걸 체화해야 한다. 이 과정을 생략하면 정보는 통과만 할 뿐 남지 않는다. 투자도 마찬가지다. 남의 분석을 복사해서 매매하면 수익이 나도 왜 났는지 모르고, 손실이 나도 왜 났는지 모른다. 기초가 있어야 질문의 수준이 올라가고, 질문의 수준이 올라가야 결과물에서 쓸모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가려낼 수 있다.

어쩌면 이건 과도기적 현상일 수도 있다. AI 엔진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고, 추론 능력도 상당히 올라왔다. 사용자도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적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과도기에 기초 없이 도구에만 의존하는 습관이 굳어지면, 나중에 교정하기가 훨씬 어렵다.

 

도구는 생각을 대신해주지 않는다.

생각하는 사람이 도구를 쓸 때 도구는 빛을 발한다. 생각을 멈추면 도구가 나를 대신하게 되고, 그때부터 도구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단단한 기초 없이 점프는 말장난이다. 과대평가의 봉우리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절망의 계곡을 직접 걸어서 건너야 한다. 그 과정이 고통스럽더라도, 그것만이 깨달음의 오르막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https://blog.naver.com/ranto28/224169693909

 

능력이 부족할수록 자기를 과대평가 한다 (Feat 더닝크루거 효과)

1999년, 데이비드 더닝과 저스틴 크루거가 심리학 이론 하나를 세상에 내놨다. 더닝-크루거 효과(Dun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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